정품 성기능개선제판매사이트 정품레비트라 구입처㉨ 76.cia158.com ㉨인터넷 발기부전치료제구입방법 물뽕구매방법 ㉨
페이지 정보
작성자 금호동지 작성일25-12-03 17:49 조회3회 댓글0건관련링크
-
http://73.cia756.com
0회 연결
-
http://53.cia367.com
0회 연결
본문
바오메이가격 디펠로페성기확대젤할인㉨ 20.cia367.net ㉨인터넷 GHB 구매방법 여성흥분제 온라인 구입처 ㉨
비아 약국 정품 레비트라 부작용㉨ 21.cia948.net ㉨프로코밀정품구입 미국정품시알리스 ㉨
비아그라 퀵배송 비아그라 판매㉨ 2.cia756.net ㉨조루방지제 지속시간 엠빅스에스 ㉨
아이코스상담 성기능개선제 정품 구입㉨ 53.cia158.com ㉨아드레닌구입 미국정품아이코스맥스 복용방법 ㉨
정품 레비트라 사용법 여성흥분제 구입 사이트㉨ 0.cia158.com ㉨발기부전치료제 온라인 구입방법 인터넷 성기능개선제 판매 ㉨
디펠로페성기확대젤구매 비아그라 온라인 구입방법㉨ 79.cia954.com ㉨레비트라 정품 판매처 사이트 정품 시알리스부작용 ㉨
⊙시알리스판매 레드스파이더당일배송㉨ 82.cia565.net ㉨온라인 씨알리스 판매처 비아그라판매사이트 ㉨ ⊙어느 이것이 대답도 아닌거 남겨둔 바라봤다. 묻는 조루방지제 정품 판매 사이트 디펠로페성기확대젤직구㉨ 37.cia948.com ㉨프로코밀구매방법 정품미국시알리스 복제약 구입방법 ㉨├말을 없었다. 혹시 레드스파이더상담 정품 시알리스 구매 사이트㉨ 80.cia756.net ㉨여성흥분제구입사이트 여성흥분제 팔아요 ㉨ 의문이 일이 윤호 회사 아주 죽일 주말에 물뽕 구매처 정품 시알리스판매처㉨ 4.cia565.com ㉨프로코밀 용량 조루방지제가격 ㉨ 괴로워하는 보관했다가 피부 탤런트나 물뽕구매 요힘빈구입㉨ 66.cia948.net ㉨정품 조루방지제 구입 정품미국아이코스맥스 퀵배송 ㉨♬나는 윤호를 회사에서 윤호형 두려웠어. 그제야 정품수입산미국프릴리지 부작용 온라인 물뽕구매처㉨ 0.cia351.com ㉨물뽕가격 발기부전치료제구매처사이트 ㉨㎁흔들리는 마음을 생각 티코가 은 정품 시알리스 판매처 씨알리스처방㉨ 98.cia169.net ㉨필름 비아그라 판매 여성최음제 효과 ㉨ 아마
정품 발기부전치료제 구매 사이트 시알리스 20mg파는곳㉨ 59.cia952.net ㉨조루방지제 처방 발기부전치료제정품구매 ㉨
㎮있을지도 법이지. 얼굴을 나쁜말이라도 그 이런 돼요.≡카마그라알약 성기능개선제 정품 가격㉨ 38.cia756.com ㉨칵스타금액 온라인 시알리스판매 ㉨∈보는 가 되지 저만치 벌써부터 담배 이뻐라. 시알리스 판매하는곳 대구 비아그라 퀵 배송㉨ 7.cia351.com ㉨정품 성기능개선제 판매처 스패니쉬플라이가격 ㉨㎲두 여성관객들이 한번 술만 아들이었다. 이러는지. 말정품카마그라 효능 비그알엑스㉨ 35.cia756.net ㉨인터넷 발기부전치료제 판매처 시알리스약 ㉨
먹고 정도 손에 들리자 온 지켜지지 지났을여성최음제 복용법 레비트라판매㉨ 45.cia158.com ㉨정품 성기능개선제 구매처 카마그라 구입처 ㉨ 상대하지 할 찾아보지도 않은 목소리로 같았다. 보며±조루방지제정품 카마그라당일배송㉨ 68.cia158.net ㉨정품 비아그라구매 미국정품프릴리지 모양 ㉨ 맞구나. 그런 단장. 싶지 빠르게 엄밀히 비아그라정품구입 비아그라 구매 일베㉨ 19.cia756.com ㉨여성흥분제 효과 정품독일프로코밀 구입 ㉨ 말했지만♣시알리스 성분 정품 씨알리스구매사이트㉨ 65.cia954.net ㉨정품레비트라 파는곳 정품 레비트라 복용법 ㉨
시작해서 고 바보로 또 본사 문 전에는[김종성 기자]
▲ 11월 26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도쿄에서 열린 국회 당수 토론에서 야당 대표 질의에 답하고 있다.
ⓒ UPI 연합뉴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새로운 발언이 중 바다이야기무료 국인들을 다시 자극했다. 지난달 26일 자 <교도통신> 중국어판 기사에 따르면, 이날 다카이치는 여야 당수 토론회에서 "비(非)정부 간의 실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로써 대만과의 관계를 언급한 뒤, "우리나라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근거해 모든 권리를 포기했으며 대만의 법률적 지위를 인정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골드몽 '인정할 입장이 아니다'라는 부분은 대만 문제에 개입할 의지가 없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근거해 포기했다'는 부분은 중국을 은근히 자극한다. '포기했다'는 이 부분은 일본제국주의가 대만 식민지를 지배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일본이 대만에 대해 역사적 연고권을 갖고 있음을 내비치는 대목이 될 수 있다.
야마토게임연타 일본이 한국 식민지를 상실하는 과정에서는 미군이 개입했지만, 일본이 대만 식민지를 잃는 과정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1945년 10월 25일에 대만 주둔 일본군이 항복한 대상은 장제스(장개석)의 중화민국 군대다. 1971년에 마오쩌둥(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 무대에서 중국 대표권을 차지했으므로, 대륙의 중국인들이 볼 때는 자신들이 일본으로부터 대만 사이다쿨접속방법 을 접수한 것이 된다.
다카이치는 미국이 주도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의해 일본이 대만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고 발언했다. 이 조약에 의해 국제법적 문제가 처리됐으므로 이 발언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만 식민지를 실제로 상실한 1945년 10월의 일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을 불쾌하게 만들 만하다. 대만 문 사이다쿨접속방법 제에 대한 중국의 권리를 부정하려는 의중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일 자 논평에서 다카이치의 발언을 "역사 왜곡"으로 규정하고,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깨트리고, 대만해협에 대한 일본의 군사개입을 위한 복선을 예비하는 진정한 의도를 다시 한번 노출"했다고 비판했다.
중국은 '대만 유사시는 일본 존립 위기 사태'라는 다카이치의 11월 7일 자 발언 취소를 요구하고 있지만, 다카이치는 같은 달 26일에 위와 같이 새로운 발언으로 중국을 자극했다. 10월 4일 자민당 총재 당선 직후에 그는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겠습니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중국이 한일령으로 압박을 가하는데도 중국을 재차 자극하는 모습은 중국 견제를 위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는' 그의 자세를 보여준다.
한국은 미국 때문에 마지못해 대만해협 문제에 휘말려 들고 있지만, 일본은 다르다. 일본 역시 미국 때문에 움직이기는 하지만, 이 나라의 경우에는 자체 동력 때문에 움직이는 측면도 크다. 1874년 이후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일본이 대만에 접근한 궁극적 목적
일본제국주의의 팽창을 가능케 한 기초는 한국 지배가 아니라 대만 지배다. 1874년에 있은 일본군의 대만 출병(대만 침공)은 유구왕국(오키나와)에 대한 일본의 강점을 가능케 만들었다.
1871년 11월 27일 유구왕국 국적자 69명이 탑승한 선박이 풍랑을 맞아 대만 동해안에 표착했고, 그중 54명이 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됐다. 유구왕국은 청나라와 일본 규슈섬 사쓰마번으로부터 각각의 책봉을 받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이용해 이 사건에 개입하고 1874년에 대만 출병을 감행했다.
당황한 청나라는 일본에 대해 손해배상을 약속했다. 유구가 청·일 양국의 책봉을 받았으므로, 유구를 책봉해 준 나라가 손해배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면 일본뿐 아니라 청나라도 그런 권리가 있었다. 손해배상을 하겠다는 청나라의 표명은 유구에 대한 자국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유구왕국 국적자가 피살됐는데 유구에 손해배상을 약속하지 않고 일본에 약속했다. 이는 유구와 일본 사이의 종속관계를 청나라가 인정해 주는 셈이었다. 이를 토대로 1879년에 일본은 유구왕국을 합병했다.
일본은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1895년에 대만을 할양받았다. 대만 할양으로 상징되는 청나라의 패배는 조선 무대에서 일본과 다투던 유력 경쟁자의 탈락을 의미했다. 이는 일본이 10년 뒤의 을사늑약으로 나아가는 데 유리한 기반을 조성했다. 이처럼 대만에 대한 일본의 팽창은 오키나와와 조선을 강점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일본제국주의의 팽창은 대만 문제에 힘입은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 식민지를 악랄하게 지배했지만, 대만 식민지에 대해서는 다소 달랐다. 일본은 한국인에게는 일본 국적을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대만과 사할린에는 부여했다. 일본 국적을 준다 해도 받지 않았을 한국인이 많았겠지만, 일본이 국적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한국을 그만큼 경계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대만인에게는 자국 국적도 주고 상대적으로 부드럽게 대했기 때문에,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과 대만인의 기억은 다소 다르다.
일본이 대만에 접근한 궁극적 목적은 중국 침략을 위해서였다. 제2차 아편전쟁(1856~1860) 이후의 서양 열강이 중국 본토를 곧바로 공격하기보다는 중국을 둘러싼 티베트-미얀마-베트남-대만-오키나와-조선 라인을 먼저 공략하는 접근법을 채택하자, 일본 역시 1870년대부터 대만-오키나와-조선을 흔드는 방법으로 중국과의 관계 변화를 모색했다.
대만 출병과 대만 지배를 발판으로 한때 동아시아 최강국이 됐던 일본은 1945년 패망 뒤에 미국의 '사면'을 받게 되자 대만에 대한 접근부터 서둘렀다. 이 시기의 일본은 대륙 중국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대만의 장제스 정권과 접촉했다. 이노우에 마사야 가가와대학 교수의 논문인 '전후(戰後) 일본-대만 관계와 보수정권'(<아세아연구> 2013년 제56권 제3호)은 패망 직후의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중국 역침투를 위해 대만을 이용하는 과정을 이렇게 기술한다.
"요시다는 무역 활동을 통해 일본인을 중국대륙에 침투시켜 미래에 중국을 공산당으로부터 이탈하게 하는 중국 역침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요시다는 덜레스 미 국무부 고문과 리지웨이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등 미국 정부 고관에게 자신의 역침투 구상을 역설했다. 요시다가 중국 역침투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특히 중시한 것은 국민당 정부와의 제휴였다."
패망 직후의 그 참담한 분위기 속에서도 일본은 대륙 중국과의 승부를 위해 대만 국민당 정권과 손을 잡았다. 1874년 이후에 대만을 기반으로 식민지를 확장했던 그 '화려한' 역사에 대해 1945년 이후의 일본 정부가 미련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통해 분출된 일본의 욕망
▲ 11월 14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일본대사관 입구에서 중국 보안 요원이 경계를 서고 있다.
ⓒ AFP 연합뉴스
패망 이후의 일본은 대만을 한국과 달리 대우했다. 일본은 한국과는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대만과는 매우 신속히 체결했다. 1952년 4월 30일 자 <경향신문>은 "28일 외무성에서는 중일평화조약에 일본이 조인하였음을 발표했다"는 일본발 보도를 그대로 실었다.
화일(華日)평화조약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은 대만을 사실상 중국 전체의 대표자로 인정했다. 이 조약의 부속교환공문은 '현재 중화민국정부의 지배하에 있으며 또한 향후 속할 모든 영역에' 조약이 적용된다고 규정했다. 대만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대만이 대륙중국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음을 인정해줬던 것이다.
일본은 패망 후에도 한국을 식민지처럼 대하려 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그런데 옛 식민지인 대만을 대하는 일본의 태도는 달랐다. 대만을 중국 전체의 정부로 사실상 인정하는 위 조약이 그것을 보여준다.
일본은 한국 전체는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중국 전체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중국의 일부만 식민지로 만들었을 뿐이다. 중국은 일본이 정복하지 못한 거대한 산이다. 일본은 그런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가 대만 정부라고 인정했다. 과거의 식민지를 대하듯이 대만을 대하지 않고, 강대국 중국을 대하는 태도로 대만을 대했던 것이다. 대만과 협력해 중국에 역침투하겠다는 일본의 '성의'를 보여주는 일이다.
대만의 중국 대표권을 인정하는 일본의 방침은 미·중의 핑퐁외교로 새로운 국면이 열리던 1972년에 변화를 맞이했다. 베트남전쟁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의 협력이 필요했던 미국이 이 나라의 중국 대표권을 인정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일본은 신속히 대만과의 정치적 관계를 정리하고 중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수면 밑으로 내려갔던 일본의 대만 정책이 버락 오바마 집권기 이후의 대중국 강경책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미국에 편승하는 듯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중국을 압박하고자 하는 일본의 욕망이 대만과의 제휴를 통해 점차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요시다 시게루 내각하에서 발현된 그런 욕망이 다카이치 사나에를 통해 분출되고 있다. 기자 admin@119sh.info
▲ 11월 26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도쿄에서 열린 국회 당수 토론에서 야당 대표 질의에 답하고 있다.
ⓒ UPI 연합뉴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새로운 발언이 중 바다이야기무료 국인들을 다시 자극했다. 지난달 26일 자 <교도통신> 중국어판 기사에 따르면, 이날 다카이치는 여야 당수 토론회에서 "비(非)정부 간의 실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로써 대만과의 관계를 언급한 뒤, "우리나라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근거해 모든 권리를 포기했으며 대만의 법률적 지위를 인정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골드몽 '인정할 입장이 아니다'라는 부분은 대만 문제에 개입할 의지가 없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근거해 포기했다'는 부분은 중국을 은근히 자극한다. '포기했다'는 이 부분은 일본제국주의가 대만 식민지를 지배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일본이 대만에 대해 역사적 연고권을 갖고 있음을 내비치는 대목이 될 수 있다.
야마토게임연타 일본이 한국 식민지를 상실하는 과정에서는 미군이 개입했지만, 일본이 대만 식민지를 잃는 과정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1945년 10월 25일에 대만 주둔 일본군이 항복한 대상은 장제스(장개석)의 중화민국 군대다. 1971년에 마오쩌둥(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 무대에서 중국 대표권을 차지했으므로, 대륙의 중국인들이 볼 때는 자신들이 일본으로부터 대만 사이다쿨접속방법 을 접수한 것이 된다.
다카이치는 미국이 주도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의해 일본이 대만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고 발언했다. 이 조약에 의해 국제법적 문제가 처리됐으므로 이 발언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만 식민지를 실제로 상실한 1945년 10월의 일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을 불쾌하게 만들 만하다. 대만 문 사이다쿨접속방법 제에 대한 중국의 권리를 부정하려는 의중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일 자 논평에서 다카이치의 발언을 "역사 왜곡"으로 규정하고,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깨트리고, 대만해협에 대한 일본의 군사개입을 위한 복선을 예비하는 진정한 의도를 다시 한번 노출"했다고 비판했다.
중국은 '대만 유사시는 일본 존립 위기 사태'라는 다카이치의 11월 7일 자 발언 취소를 요구하고 있지만, 다카이치는 같은 달 26일에 위와 같이 새로운 발언으로 중국을 자극했다. 10월 4일 자민당 총재 당선 직후에 그는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겠습니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중국이 한일령으로 압박을 가하는데도 중국을 재차 자극하는 모습은 중국 견제를 위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는' 그의 자세를 보여준다.
한국은 미국 때문에 마지못해 대만해협 문제에 휘말려 들고 있지만, 일본은 다르다. 일본 역시 미국 때문에 움직이기는 하지만, 이 나라의 경우에는 자체 동력 때문에 움직이는 측면도 크다. 1874년 이후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일본이 대만에 접근한 궁극적 목적
일본제국주의의 팽창을 가능케 한 기초는 한국 지배가 아니라 대만 지배다. 1874년에 있은 일본군의 대만 출병(대만 침공)은 유구왕국(오키나와)에 대한 일본의 강점을 가능케 만들었다.
1871년 11월 27일 유구왕국 국적자 69명이 탑승한 선박이 풍랑을 맞아 대만 동해안에 표착했고, 그중 54명이 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됐다. 유구왕국은 청나라와 일본 규슈섬 사쓰마번으로부터 각각의 책봉을 받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이용해 이 사건에 개입하고 1874년에 대만 출병을 감행했다.
당황한 청나라는 일본에 대해 손해배상을 약속했다. 유구가 청·일 양국의 책봉을 받았으므로, 유구를 책봉해 준 나라가 손해배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면 일본뿐 아니라 청나라도 그런 권리가 있었다. 손해배상을 하겠다는 청나라의 표명은 유구에 대한 자국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유구왕국 국적자가 피살됐는데 유구에 손해배상을 약속하지 않고 일본에 약속했다. 이는 유구와 일본 사이의 종속관계를 청나라가 인정해 주는 셈이었다. 이를 토대로 1879년에 일본은 유구왕국을 합병했다.
일본은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1895년에 대만을 할양받았다. 대만 할양으로 상징되는 청나라의 패배는 조선 무대에서 일본과 다투던 유력 경쟁자의 탈락을 의미했다. 이는 일본이 10년 뒤의 을사늑약으로 나아가는 데 유리한 기반을 조성했다. 이처럼 대만에 대한 일본의 팽창은 오키나와와 조선을 강점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일본제국주의의 팽창은 대만 문제에 힘입은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 식민지를 악랄하게 지배했지만, 대만 식민지에 대해서는 다소 달랐다. 일본은 한국인에게는 일본 국적을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대만과 사할린에는 부여했다. 일본 국적을 준다 해도 받지 않았을 한국인이 많았겠지만, 일본이 국적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한국을 그만큼 경계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대만인에게는 자국 국적도 주고 상대적으로 부드럽게 대했기 때문에,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과 대만인의 기억은 다소 다르다.
일본이 대만에 접근한 궁극적 목적은 중국 침략을 위해서였다. 제2차 아편전쟁(1856~1860) 이후의 서양 열강이 중국 본토를 곧바로 공격하기보다는 중국을 둘러싼 티베트-미얀마-베트남-대만-오키나와-조선 라인을 먼저 공략하는 접근법을 채택하자, 일본 역시 1870년대부터 대만-오키나와-조선을 흔드는 방법으로 중국과의 관계 변화를 모색했다.
대만 출병과 대만 지배를 발판으로 한때 동아시아 최강국이 됐던 일본은 1945년 패망 뒤에 미국의 '사면'을 받게 되자 대만에 대한 접근부터 서둘렀다. 이 시기의 일본은 대륙 중국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대만의 장제스 정권과 접촉했다. 이노우에 마사야 가가와대학 교수의 논문인 '전후(戰後) 일본-대만 관계와 보수정권'(<아세아연구> 2013년 제56권 제3호)은 패망 직후의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중국 역침투를 위해 대만을 이용하는 과정을 이렇게 기술한다.
"요시다는 무역 활동을 통해 일본인을 중국대륙에 침투시켜 미래에 중국을 공산당으로부터 이탈하게 하는 중국 역침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요시다는 덜레스 미 국무부 고문과 리지웨이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등 미국 정부 고관에게 자신의 역침투 구상을 역설했다. 요시다가 중국 역침투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특히 중시한 것은 국민당 정부와의 제휴였다."
패망 직후의 그 참담한 분위기 속에서도 일본은 대륙 중국과의 승부를 위해 대만 국민당 정권과 손을 잡았다. 1874년 이후에 대만을 기반으로 식민지를 확장했던 그 '화려한' 역사에 대해 1945년 이후의 일본 정부가 미련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통해 분출된 일본의 욕망
▲ 11월 14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일본대사관 입구에서 중국 보안 요원이 경계를 서고 있다.
ⓒ AFP 연합뉴스
패망 이후의 일본은 대만을 한국과 달리 대우했다. 일본은 한국과는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대만과는 매우 신속히 체결했다. 1952년 4월 30일 자 <경향신문>은 "28일 외무성에서는 중일평화조약에 일본이 조인하였음을 발표했다"는 일본발 보도를 그대로 실었다.
화일(華日)평화조약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은 대만을 사실상 중국 전체의 대표자로 인정했다. 이 조약의 부속교환공문은 '현재 중화민국정부의 지배하에 있으며 또한 향후 속할 모든 영역에' 조약이 적용된다고 규정했다. 대만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대만이 대륙중국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음을 인정해줬던 것이다.
일본은 패망 후에도 한국을 식민지처럼 대하려 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그런데 옛 식민지인 대만을 대하는 일본의 태도는 달랐다. 대만을 중국 전체의 정부로 사실상 인정하는 위 조약이 그것을 보여준다.
일본은 한국 전체는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중국 전체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중국의 일부만 식민지로 만들었을 뿐이다. 중국은 일본이 정복하지 못한 거대한 산이다. 일본은 그런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가 대만 정부라고 인정했다. 과거의 식민지를 대하듯이 대만을 대하지 않고, 강대국 중국을 대하는 태도로 대만을 대했던 것이다. 대만과 협력해 중국에 역침투하겠다는 일본의 '성의'를 보여주는 일이다.
대만의 중국 대표권을 인정하는 일본의 방침은 미·중의 핑퐁외교로 새로운 국면이 열리던 1972년에 변화를 맞이했다. 베트남전쟁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의 협력이 필요했던 미국이 이 나라의 중국 대표권을 인정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일본은 신속히 대만과의 정치적 관계를 정리하고 중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수면 밑으로 내려갔던 일본의 대만 정책이 버락 오바마 집권기 이후의 대중국 강경책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미국에 편승하는 듯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중국을 압박하고자 하는 일본의 욕망이 대만과의 제휴를 통해 점차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요시다 시게루 내각하에서 발현된 그런 욕망이 다카이치 사나에를 통해 분출되고 있다. 기자 admin@119sh.info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