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그라로 다시 찾은 사랑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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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금호동지 작성일25-12-05 13:27 조회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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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그라로 다시 찾은 사랑의 온기
1. 사랑의 온기, 시간이 지나면 식는다?
사랑의 온기는 때로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식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서로에게 불타오르던 그 감정, 뜨거운 열정은 시간이 지나며 익숙해지고, 그런 변화는 종종 육체적인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성적인 매력과 활력은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은 성적인 문제가 생기면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거나, 그냥 지나치려 합니다. 하지만 사실 성적인 문제는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남성의 경우, 성적 자신감이 떨어지면 감정적으로도 관계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해결책 중 하나가 바로 비아그라입니다. 비아그라는 단순히 발기부전 치료제가 아니라, 사랑의 온기를 되살리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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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아그라, 관계의 품질을 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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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 존중과 신뢰 비아그라 사용 후 관계가 개선되면서, 두 사람 간의 신뢰와 존중이 더욱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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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결론사랑의 온기를 되찾는 방법, 비아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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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lotmega.info
[인터뷰] 책 '계엄군 계엄군' 저자 김태훈 SBS 국방전문기자 계엄 후 1년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 붕괴' 미해결 과제 군이 정치권력 수단으로 퇴락…관성적 취재 관행 지적도
[미디어오늘 윤유경 기자]
▲책 '계엄군(君) 계엄군(群)' 저자 김태훈 SBS 국방전문기자. 사진=김태훈 기자 제공.
지난해 12월3일, 국방부는 비상계엄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비상계 릴게임5만 엄 선포는 밤 10시23분 TV로 생중계됐고, 국방부 기자들은 비상이 걸렸다. 서울 용산 삼각지에 위치한 국방부 건물 안에 있던 기자들은 군사경찰의 '나가라'는 퇴거 명령에 맞서 버텼다. “테이저건(전기 충격용 권총)을 쏠 수도 있다”는 위협도 들어야 했다. 국방부 밖에 있던 기자들은 출입이 막힌 상황에 항의했다. 국방부 청사 입구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됐고 야마토무료게임 , 들어오지 못한 기자들은 맞은편 전쟁기념관 입구 쪽에 모였다.
김태훈 SBS 국방전문기자는 국방부 밖에 있던 기자들 중 한 명이었다. 계엄 선포 당시 집이었던 그는 급하게 핸드폰으로 뉴스 특보 전화 리포트를 한 뒤 밤 12시경 국방부로 향했다. 다른 출입처에 비해 급박한 일이 많아 늘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국방부 고 릴게임신천지 참 출입 기자였음에도 '이건 뭐지?' 싶었다. 국방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그는 전쟁기념관 앞에서 밤을 샜다.
새벽 중 리포트를 해야 하는데 노트북 배터리가 방전돼 삼각지역 인근 지하 노래방에서 충전하면서 기사를 썼다. 노래방 주인장은 마치 5·18 광주 시민군을 대하듯 '고생한다'며 전기난로도 틀어 주고 꿀차도 타줬다. 그 새벽에도 옆방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에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내쫓을까요”라는 주인장의 말에 손사래를 친 뒤 '다음엔 노래를 부르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무사히 리포트를 마친 그날부터 밤낮 없이 계엄의 전말을 파헤치는 그의 취재기가 시작됐다.
김 기자가 포함된 SBS 외교안보팀은 계엄 관련 굵직한 단독보도를 이어왔다. 계엄 해제 이튿날인 12월5일에는 김용현 당시 국방부 릴게임예시 장관에게서 최초로 “부정선거 의혹 관련 수사 필요성 판단을 위해” 계엄군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투입했다는 증언을 받아냈다. 보도는 후에 윤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증거로 쓰였다.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진술도 처음으로 받아냈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모든 진술을 거부해 검찰이 '유일한 인터뷰'를 한 SBS측에 녹취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김 기자는 “취재원이 선하건 악하건 보호해야 하는 것이 기자의 윤리”라는 생각으로 주지 않았다.
▲책 '계엄군(君) 계엄군(群)' 표지. (저자 김태훈, 출판 더퍼플미디어)
그는 SBS의 취재기록물을 모아 지난해 4월 책 '계엄군(君) 계엄군(群)'을 출간했다. 앞의 '임금 군'(君)은 계엄을 일으킨 대통령 윤석열, 뒤의 '무리 군'(群)은 계엄에 참여한 이들을 의미한다. 지난달 27일 오후 국방부에서 만난 김 기자는 “국방부는 살아있는 취재 현장”이라며 “계엄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계엄이 끝난 뒤에도 국방부에서 취재가 이뤄져야 한다. 국방부 현장에 있던 기자로서 기록을 남기는 게 필요했다”고 말했다. 계엄 후 약 1년이 지난 지금, 국방전문기자인 그가 강조한 건 계엄으로 처절히 무너진 '군의 신뢰 회복'이다. 그는 신뢰를 회복하려면 '군과 정치의 분리'가 필수적이라며 “군과 정치는 결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계엄이 남긴 피해…군에 대한 신뢰 붕괴
계엄이라는 극단적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뭘까. 아니 계엄을 막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김 기자는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 텐데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지난해 7월부터 계엄 관련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김 기자가 국가정보원 소식통으로부터 “대통령실이 아주 특이한 명분의 계엄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들은 것도 그때쯤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계엄이라니, 회사에서 '삼각지에 오래 살더니 이상해졌다'는 소리 들을까 보고도 못한 일이었다.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김병주, 박선원 의원 등은 8월 들어 계엄을 말하기 시작했고, 여당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계엄론 공세에 '황당한 막말 퍼레이드'라며 반발했다.
“'누군가 먼저 안 사람들이 왜 계엄을 막지 못했을까' 안타깝다. 김용현(전 국방부 장관), 여인형(전 국군방첩사령관), 이진우(전 수도방위사령관), 곽종근(전 특수전사령관)은 왜 막지 못했을까.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답답한 건 국민의힘이다. 기자도 알고 야당도 아는데 여당은 몰랐을까? 일찍 안 사람이 있었을 텐데 계엄을 막을 생각을 안 한 거다. 누군가 '불이야' 외쳐버렸으면 못했을텐데, 그게 아쉬운 거다.”
▲ 12·3 불법 비상계엄 당시 국회 현장. ⓒ연합뉴스
그렇게 막지 못한 계엄은 선포됐고, 1년 간 진상 규명을 위한 절차들이 숨 가쁘게 진행됐다. 그러나 계엄으로 인해 처참히 붕괴된 군에 대한 신뢰는 회복되지 못했다. 김 기자가 꼽은 계엄이 남긴 가장 큰 피해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계엄 이후 국민은 군을 믿지 않게 됐다. 아무리 군이 강하다고 해도 그보다 중요한 건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군이 되는 것이다. 신뢰가 깨지면 오합지졸이다. 국민이 믿지 않는데 어떻게 군인들이 싸울 수 있나. 한국은 옛날에도 계엄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 군에 대한 이미지가 원래 좋지 않았는데 계엄으로 바닥을 뚫고 지하로 가버렸다. 정부 여당은 군의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신뢰 회복 위해선 '군과 정치 분리돼야'
그는 안보를 생각한다면 '내란 척결'과 함께 군의 신뢰를 회복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군과 정치의 분리'가 필수다. 정치는 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면 안 되고, 군은 정치권력이 던지는 떡고물에 냉담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군을 수단으로 삼아 이익을 좇는 경향이 있다. 김 기자는 책 '계엄군 계엄군'에서도 군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지적했다.
“2010년 이후 취임한 국방부 장관들은 예외가 없었다. 43대 김관진, 44대 한민구, 45대 송영무, 46대 정경두, 47대 서욱, 48대 이종섭, 49대 신원식, 50대 김용현 등이다. 한명도 빠짐없이 장관 퇴임 후 검찰 수사를 피하지 못했고, 일부는 감옥에 갔다. (…) 15년 동안 8명 장관이 최소한 검찰 수사를 받는 국방부가 해외라고 있을까. 하나같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됐다. (…) 절정은 군이 정치권력의 수단으로 퇴락한 12·3 비상계엄이다. 12·3 계엄을 정통으로 맞고도 군과 정치를 분리시키지 못한다면 51대 국방부 장관은 퇴임 후 평온한 노년을 기대할 수 없고, 군의 정치 중립 기대도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p.266)
김 기자는 2022년 펴낸 책 '한국군의 두 얼굴'에서도 진보 정부와 보수 정부가 군을 이용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군은 항상 적대적 대북 인식을 갖고 있는 가운데 대북 인식이 우호적인 진보 정부는 군에 간섭하고 적대적인 보수 정부는 군에 자율성을 준다는 가설을 세웠고, 이는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4개 정부 기간 벌어진 남북의 군사 충돌을 분석한 결과 증명됐다.
그는 간섭과 자율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의 현장 지휘관에게 정무적 판단으로 현장에서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을 주되 권한의 범위는 제한하는 식이다. 균형은 곧 '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김 기자는 “적당한 규범을 만들어주는 거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정치적으로 상대쪽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며 “균형을 잡아주면 권력도 군을 이용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관성적 취재 지적도 “언론 발전하려면 치열함 있어야”
계엄과 탄핵을 거치며 언론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따옴표 저널리즘, 기계적 중립 등 많은 문제들이 지적됐지만, 현장의 중심에 있던 김 기자는 '관성적 취재 행태'를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 2024년 12월12일 SBS 8뉴스 단독보도 ''결심실 회의' 안보실 2차장·국방비서관 참석' 보도화면 갈무리.
계엄 당시 대통령실 인사들의 행적을 밝혀낸 보도 후엔 타사 보도를 보며 섭섭한 일도 많았다. 당시 김 기자는 국회에서 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한 직후 당시 대통령과 김용현 국방부 장관, 박안수 계엄사령관이 국방부 지하 합참 결심실에서 진행한 회의에 인성환 국가안보실 2차장, 최병옥 국방 비서관도 참석했다고 단독 보도했다. '2차 계엄 모의' 의혹을 던진 해당 보도 직후 대통령실은 “통상적 수행이었고 2차 계엄 논의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는 해명 자료를 냈다. 대통령실 입장을 비판적 시각 없이 받아쓴 매체가 다수였고, SBS 보도를 부정하는 식의 기사도 있었다. 김 기자는 책에서 이 사례를 언급하며 “마치 대통령실의 입장은 흠결이 존재할 수 없는 천상의 목소리인 양 받아 적었다”며 “기자들이 그동안 그렇게 행동했으니까 윤석열 대통령도 거리낌 없이 폭주했을 수밖에”라고 일갈했다.
계엄 이튿날 김용현 장관에게 '부정선거 때문에 군을 선관위에 투입했다'는 증언을 받아냈던 취재 역시 한발 더 나아간 질문을 했기에 가능했다. 당시 오전 9시경 한 통신사에서 먼저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겠다”는 김 장관의 답을 받아 1보를 썼다. 김 기자는 당시 다수 타사 기자들도 김 장관과 소통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역시 김 장관에게 텔레그램으로 같은 답을 받은 김 기자는 더 나아간 질문을 위해 동료들과 고민했다. 그렇게 김 장관의 입에서 계엄 국면 처음으로 '부정선거'라는 단어가 나왔다. 아울러 “국회에 계엄군을 보낸 건 계엄 해제 표결을 막기 위해서인가”라는 그의 마지막 질문에 김 장관이 “최소한의 필요한 조치였다”고 인정하며 계엄의 실체가 밝혀졌다.
▲ 2024년 12월5일 김용현 장관과 김태훈 기자의 텔레그램 대화. 사진=김태훈 기자 제공.
김 기자는 “다른 기자들도 누군가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8시 뉴스' 방송까지 조마조마했는데 아무도 보도하지 않았다. 김 장관과 소통한 기자는 많은데 이것까지는 안 물어본 거다. 왜 안 물어봤을까. 관성에 빠져있던 건 아닐까”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힘들지만 몇 마디만 더 물어봤으면 되는데, 언론이 발전하려면 치열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김 기자는 “단지 기사만이 아니라 그 기사가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 기록이 있어야 한다”며 “국회에서도, 법조에서도 계엄 관련해 사람들의 기록은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계엄 이후 그의 일상은 달라졌다. “집에 누워있다가도 계엄 생각만 했다. 벌떡 일어나서 뜬금없이 전화하는 거다. 1~2월까지 그 생활을 계속했다”는 김 기자는 국방부에서 생생한 현장 기사로 돌파구를 마련해줘야 법조·국회 등에서 뒤이어 기사를 쓸 수 있다는 책임감과, 파헤치지 않으면 진실이 사장될 수 있다는 간절함이 있었다고 전했다.
[미디어오늘 윤유경 기자]
▲책 '계엄군(君) 계엄군(群)' 저자 김태훈 SBS 국방전문기자. 사진=김태훈 기자 제공.
지난해 12월3일, 국방부는 비상계엄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비상계 릴게임5만 엄 선포는 밤 10시23분 TV로 생중계됐고, 국방부 기자들은 비상이 걸렸다. 서울 용산 삼각지에 위치한 국방부 건물 안에 있던 기자들은 군사경찰의 '나가라'는 퇴거 명령에 맞서 버텼다. “테이저건(전기 충격용 권총)을 쏠 수도 있다”는 위협도 들어야 했다. 국방부 밖에 있던 기자들은 출입이 막힌 상황에 항의했다. 국방부 청사 입구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됐고 야마토무료게임 , 들어오지 못한 기자들은 맞은편 전쟁기념관 입구 쪽에 모였다.
김태훈 SBS 국방전문기자는 국방부 밖에 있던 기자들 중 한 명이었다. 계엄 선포 당시 집이었던 그는 급하게 핸드폰으로 뉴스 특보 전화 리포트를 한 뒤 밤 12시경 국방부로 향했다. 다른 출입처에 비해 급박한 일이 많아 늘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국방부 고 릴게임신천지 참 출입 기자였음에도 '이건 뭐지?' 싶었다. 국방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그는 전쟁기념관 앞에서 밤을 샜다.
새벽 중 리포트를 해야 하는데 노트북 배터리가 방전돼 삼각지역 인근 지하 노래방에서 충전하면서 기사를 썼다. 노래방 주인장은 마치 5·18 광주 시민군을 대하듯 '고생한다'며 전기난로도 틀어 주고 꿀차도 타줬다. 그 새벽에도 옆방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에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내쫓을까요”라는 주인장의 말에 손사래를 친 뒤 '다음엔 노래를 부르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무사히 리포트를 마친 그날부터 밤낮 없이 계엄의 전말을 파헤치는 그의 취재기가 시작됐다.
김 기자가 포함된 SBS 외교안보팀은 계엄 관련 굵직한 단독보도를 이어왔다. 계엄 해제 이튿날인 12월5일에는 김용현 당시 국방부 릴게임예시 장관에게서 최초로 “부정선거 의혹 관련 수사 필요성 판단을 위해” 계엄군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투입했다는 증언을 받아냈다. 보도는 후에 윤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증거로 쓰였다.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진술도 처음으로 받아냈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모든 진술을 거부해 검찰이 '유일한 인터뷰'를 한 SBS측에 녹취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김 기자는 “취재원이 선하건 악하건 보호해야 하는 것이 기자의 윤리”라는 생각으로 주지 않았다.
▲책 '계엄군(君) 계엄군(群)' 표지. (저자 김태훈, 출판 더퍼플미디어)
그는 SBS의 취재기록물을 모아 지난해 4월 책 '계엄군(君) 계엄군(群)'을 출간했다. 앞의 '임금 군'(君)은 계엄을 일으킨 대통령 윤석열, 뒤의 '무리 군'(群)은 계엄에 참여한 이들을 의미한다. 지난달 27일 오후 국방부에서 만난 김 기자는 “국방부는 살아있는 취재 현장”이라며 “계엄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계엄이 끝난 뒤에도 국방부에서 취재가 이뤄져야 한다. 국방부 현장에 있던 기자로서 기록을 남기는 게 필요했다”고 말했다. 계엄 후 약 1년이 지난 지금, 국방전문기자인 그가 강조한 건 계엄으로 처절히 무너진 '군의 신뢰 회복'이다. 그는 신뢰를 회복하려면 '군과 정치의 분리'가 필수적이라며 “군과 정치는 결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계엄이 남긴 피해…군에 대한 신뢰 붕괴
계엄이라는 극단적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뭘까. 아니 계엄을 막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김 기자는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 텐데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지난해 7월부터 계엄 관련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김 기자가 국가정보원 소식통으로부터 “대통령실이 아주 특이한 명분의 계엄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들은 것도 그때쯤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계엄이라니, 회사에서 '삼각지에 오래 살더니 이상해졌다'는 소리 들을까 보고도 못한 일이었다.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김병주, 박선원 의원 등은 8월 들어 계엄을 말하기 시작했고, 여당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계엄론 공세에 '황당한 막말 퍼레이드'라며 반발했다.
“'누군가 먼저 안 사람들이 왜 계엄을 막지 못했을까' 안타깝다. 김용현(전 국방부 장관), 여인형(전 국군방첩사령관), 이진우(전 수도방위사령관), 곽종근(전 특수전사령관)은 왜 막지 못했을까.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답답한 건 국민의힘이다. 기자도 알고 야당도 아는데 여당은 몰랐을까? 일찍 안 사람이 있었을 텐데 계엄을 막을 생각을 안 한 거다. 누군가 '불이야' 외쳐버렸으면 못했을텐데, 그게 아쉬운 거다.”
▲ 12·3 불법 비상계엄 당시 국회 현장. ⓒ연합뉴스
그렇게 막지 못한 계엄은 선포됐고, 1년 간 진상 규명을 위한 절차들이 숨 가쁘게 진행됐다. 그러나 계엄으로 인해 처참히 붕괴된 군에 대한 신뢰는 회복되지 못했다. 김 기자가 꼽은 계엄이 남긴 가장 큰 피해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계엄 이후 국민은 군을 믿지 않게 됐다. 아무리 군이 강하다고 해도 그보다 중요한 건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군이 되는 것이다. 신뢰가 깨지면 오합지졸이다. 국민이 믿지 않는데 어떻게 군인들이 싸울 수 있나. 한국은 옛날에도 계엄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 군에 대한 이미지가 원래 좋지 않았는데 계엄으로 바닥을 뚫고 지하로 가버렸다. 정부 여당은 군의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신뢰 회복 위해선 '군과 정치 분리돼야'
그는 안보를 생각한다면 '내란 척결'과 함께 군의 신뢰를 회복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군과 정치의 분리'가 필수다. 정치는 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면 안 되고, 군은 정치권력이 던지는 떡고물에 냉담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군을 수단으로 삼아 이익을 좇는 경향이 있다. 김 기자는 책 '계엄군 계엄군'에서도 군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지적했다.
“2010년 이후 취임한 국방부 장관들은 예외가 없었다. 43대 김관진, 44대 한민구, 45대 송영무, 46대 정경두, 47대 서욱, 48대 이종섭, 49대 신원식, 50대 김용현 등이다. 한명도 빠짐없이 장관 퇴임 후 검찰 수사를 피하지 못했고, 일부는 감옥에 갔다. (…) 15년 동안 8명 장관이 최소한 검찰 수사를 받는 국방부가 해외라고 있을까. 하나같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됐다. (…) 절정은 군이 정치권력의 수단으로 퇴락한 12·3 비상계엄이다. 12·3 계엄을 정통으로 맞고도 군과 정치를 분리시키지 못한다면 51대 국방부 장관은 퇴임 후 평온한 노년을 기대할 수 없고, 군의 정치 중립 기대도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p.266)
김 기자는 2022년 펴낸 책 '한국군의 두 얼굴'에서도 진보 정부와 보수 정부가 군을 이용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군은 항상 적대적 대북 인식을 갖고 있는 가운데 대북 인식이 우호적인 진보 정부는 군에 간섭하고 적대적인 보수 정부는 군에 자율성을 준다는 가설을 세웠고, 이는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4개 정부 기간 벌어진 남북의 군사 충돌을 분석한 결과 증명됐다.
그는 간섭과 자율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의 현장 지휘관에게 정무적 판단으로 현장에서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을 주되 권한의 범위는 제한하는 식이다. 균형은 곧 '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김 기자는 “적당한 규범을 만들어주는 거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정치적으로 상대쪽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며 “균형을 잡아주면 권력도 군을 이용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관성적 취재 지적도 “언론 발전하려면 치열함 있어야”
계엄과 탄핵을 거치며 언론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따옴표 저널리즘, 기계적 중립 등 많은 문제들이 지적됐지만, 현장의 중심에 있던 김 기자는 '관성적 취재 행태'를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 2024년 12월12일 SBS 8뉴스 단독보도 ''결심실 회의' 안보실 2차장·국방비서관 참석' 보도화면 갈무리.
계엄 당시 대통령실 인사들의 행적을 밝혀낸 보도 후엔 타사 보도를 보며 섭섭한 일도 많았다. 당시 김 기자는 국회에서 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한 직후 당시 대통령과 김용현 국방부 장관, 박안수 계엄사령관이 국방부 지하 합참 결심실에서 진행한 회의에 인성환 국가안보실 2차장, 최병옥 국방 비서관도 참석했다고 단독 보도했다. '2차 계엄 모의' 의혹을 던진 해당 보도 직후 대통령실은 “통상적 수행이었고 2차 계엄 논의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는 해명 자료를 냈다. 대통령실 입장을 비판적 시각 없이 받아쓴 매체가 다수였고, SBS 보도를 부정하는 식의 기사도 있었다. 김 기자는 책에서 이 사례를 언급하며 “마치 대통령실의 입장은 흠결이 존재할 수 없는 천상의 목소리인 양 받아 적었다”며 “기자들이 그동안 그렇게 행동했으니까 윤석열 대통령도 거리낌 없이 폭주했을 수밖에”라고 일갈했다.
계엄 이튿날 김용현 장관에게 '부정선거 때문에 군을 선관위에 투입했다'는 증언을 받아냈던 취재 역시 한발 더 나아간 질문을 했기에 가능했다. 당시 오전 9시경 한 통신사에서 먼저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겠다”는 김 장관의 답을 받아 1보를 썼다. 김 기자는 당시 다수 타사 기자들도 김 장관과 소통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역시 김 장관에게 텔레그램으로 같은 답을 받은 김 기자는 더 나아간 질문을 위해 동료들과 고민했다. 그렇게 김 장관의 입에서 계엄 국면 처음으로 '부정선거'라는 단어가 나왔다. 아울러 “국회에 계엄군을 보낸 건 계엄 해제 표결을 막기 위해서인가”라는 그의 마지막 질문에 김 장관이 “최소한의 필요한 조치였다”고 인정하며 계엄의 실체가 밝혀졌다.
▲ 2024년 12월5일 김용현 장관과 김태훈 기자의 텔레그램 대화. 사진=김태훈 기자 제공.
김 기자는 “다른 기자들도 누군가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8시 뉴스' 방송까지 조마조마했는데 아무도 보도하지 않았다. 김 장관과 소통한 기자는 많은데 이것까지는 안 물어본 거다. 왜 안 물어봤을까. 관성에 빠져있던 건 아닐까”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힘들지만 몇 마디만 더 물어봤으면 되는데, 언론이 발전하려면 치열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김 기자는 “단지 기사만이 아니라 그 기사가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 기록이 있어야 한다”며 “국회에서도, 법조에서도 계엄 관련해 사람들의 기록은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계엄 이후 그의 일상은 달라졌다. “집에 누워있다가도 계엄 생각만 했다. 벌떡 일어나서 뜬금없이 전화하는 거다. 1~2월까지 그 생활을 계속했다”는 김 기자는 국방부에서 생생한 현장 기사로 돌파구를 마련해줘야 법조·국회 등에서 뒤이어 기사를 쓸 수 있다는 책임감과, 파헤치지 않으면 진실이 사장될 수 있다는 간절함이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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