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트라사랑을 위한 최고의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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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금호동지 작성일25-12-10 16:14 조회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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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트라사랑을 위한 최고의 동반자
발기부전은 많은 남성들에게 심리적, 신체적, 그리고 관계적인 어려움을 가져오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감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레비트라는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레비트라의 특징, 작용 원리, 사용법,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떻게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레비트라의 주요 특징
레비트라는 바르데나필Vardenafil을 주성분으로 하는 발기부전 치료제입니다. PDE5 억제제로 분류되는 레비트라는 음경으로의 혈류를 개선하여 성적 자극이 있을 때 자연스러운 발기를 돕습니다. 발기부전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는 많은 남성들에게 레비트라는 효과적이고 안전한 해결책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빠른 효과 발현: 레비트라는 복용 후 약 2560분 안에 효과를 발휘하며, 약효는 45시간 지속됩니다.
음식과의 호환성: 레비트라는 일반적인 식사와 함께 복용해도 약효가 유지됩니다. 다만, 고지방 음식을 피하면 효과가 더욱 잘 나타납니다.
높은 신뢰성: 다양한 임상 연구에서 레비트라는 안정적이고 일관된 효과를 보여주었습니다.
부작용 감소: 다른 치료제와 비교해 부작용 발생률이 낮으며, 두통, 안면 홍조, 소화불량 등의 경미한 증상이 보고될 수 있습니다.
레비트라의 작용 원리
레비트라는 PDE5 효소를 억제하여 음경 혈관의 이완을 촉진합니다. 이를 통해 혈류가 증가하고, 발기부전의 주요 원인을 해결합니다. 성적 자극이 있을 때만 작용하므로 자연스러운 성 반응을 유지하며, 사용자의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듭니다.
올바른 레비트라 사용법
레비트라는 안전한 약물이지만,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다음 사용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복용량: 일반적인 시작 용량은 10mg이며, 필요에 따라 5mg에서 20mg까지 조정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이상 복용하지 마세요.
복용 시점: 성적 활동 30~60분 전에 복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금기 사항: 질산염 계열 약물을 복용 중인 경우, 또는 특정 심혈관 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 레비트라 사용을 피해야 합니다.
의사 상담: 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적절한 복용량과 사용법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반드시 의사의 상담을 받아야 합니다.
레비트라와 함께하는 자신감 회복
레비트라는 단순히 발기부전을 해결하는 약물을 넘어, 남성의 자신감과 삶의 질을 회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생활은 개인의 행복과 파트너와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레비트라는 이러한 성생활의 질을 높이고, 파트너와의 관계를 한층 더 깊고 의미 있게 만들어 줍니다.
건강한 생활 습관과 병행하기
레비트라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은 레비트라 사용과 병행할 수 있는 몇 가지 팁입니다:
운동하기: 규칙적인 운동은 심혈관 건강을 개선하고, 전반적인 체력을 높여줍니다.
균형 잡힌 식단: 신선한 과일과 채소,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을 섭취하며, 과도한 염분과 설탕 섭취를 줄이세요.
스트레스 관리: 명상, 요가, 또는 취미 활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줄이고 정신적 안정을 유지하세요.
정기적인 건강 검진: 전립선 건강과 심혈관 상태를 점검하여 잠재적인 문제를 조기에 예방하세요.
레비트라가 선사하는 사랑과 행복
레비트라는 많은 남성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자신감을 안겨주는 약물입니다. 단순히 발기부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삶의 질을 높이고 파트너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줍니다.
발기부전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다면, 레비트라를 통해 그 고민을 덜어내고 자신감을 되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더욱 소중하고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결론: 레비트라사랑을 위한 최고의 선택
레비트라는 발기부전 치료제 중에서도 그 효과와 안전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과 자신감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레비트라와 함께 시작해보세요. 건강한 성생활과 행복한 관계는 당신과 파트너 모두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기자 admin@slotmega.info
상하이 임시정부의 살림꾼으로서 독립운동자금 운반과 교육운동에 헌신한 정정화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가 많지만 여성은 매우 드물다. 조선말-대한제국-일제 36년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는 여전히 봉건적 사회·신분질서가 공고했고 여성은 운신의 폭은 매우 좁았다.
◇ 지역 출신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왼쪽부터), 정정화, 이국영, 이은숙 , 민옥 바다이야기오락실 금, 황금순
한이순(왼쪽부터), 김복희, 김현경, 김인애, 민인숙, 박재복
독립운동도 남성 중심으로 이뤄졌다. 2025년 8월 15일 현재 독립유공자는 전체 1만8569명이고 야마토게임 여성은 652명으로 3.5%에 불과하다. 상훈법에 따라 독립유공자는 1등급 대한민국장부터 7등급 대통령표창까지 추서되는데 여성 독립유공자들은 대부분 최하위 훈격인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충청권 여성 독립유공자는 30여 명으로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참여자가 많고, 남편이나 시댁을 따라 만주와 상하이, 베이징에서 항일운동을 벌인 인물도 있 오리지널골드몽 다.
충북 충주와 중국 만주에서 의병운동을 벌인 윤희순의 묘는 중국 요녕성 해성시 묘관둔 북산 하이청에 있다. 사진=독립기념관
윤희순이 1912년 환 바다이야기프로그램다운로드 인현 남괴마자에 동창학교의 분교인 노학당을 세워 인재를 길러냈다. 사진=독립기념관
가장 이른 시기 독립투쟁을 벌인 충청 여성은 충북 충주 출신의 윤희순이다. 1895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키자 식사와 의복을 지원했으며 '안사람 의병가' '의병군가' 등의 군가를 지어 전투 의지를 고취시켰다. 바다이야기pc버전다운 1907년 유홍석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자 군자금을 모으고 탄약과 군량을 공급했다. 1911년 시아버지와 남편 유제원을 따라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벌였다. 간도와 연해주의 의병들이 결성한 조선독립단에서 활동하고, 노학당의 교장을 맡아 항일인재를 키워냈다. 친척 20여 명으로 가족부대를 조직, 연락과 정보수집, 군자금 모금, 군사훈련 등을 이끌었다. 자신과 시아버지, 남편, 아들 유돈상까지 3대 4명이 독립운동가이다.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 불리는 정정화(앉은 이)와 남편 김의한(왼쪽), 시아버지 김가진. 어린이는 '임정의 아들'로 불리는 김자동이다. 정정화와 김의한 김가진 모두 독립유공자이다. 사진=독립기념관)
임정요인들과 함께 한 정정화(앞줄 왼쪽 2번째). 뒷줄 왼쪽에서 네번 째부터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이다. 사진=독립기념관
1940년 6월 17일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 앞줄 왼쪽 두번째가 정정화, 3번째가 이국영, 두번째줄 왼쪽부터 6번째가 오건해(청주 출신 신건식의 부인), 8번째가 김수현(이국영의 모친), 셋째줄 왼쪽에서 6번째가 연미당(증평 출신 연병호의 딸)이다. 사진=독립기념관
충남 예산군 대술면이 친정인 수당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 불린다. 1900년 생으로 1910년 김의한과 결혼했으며, 1920년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아 대담하게 국내를 6차례나 오가며 독립운동자금을 운반했다. 임정의 안주인 역할도 해냈다. 백범 김구와 석오 이동녕, 성재 이시영 등 임정 식구들의 끼니를 책임졌다. 1938년 남목청사건 때 피격된 김구를 간호를 하고, 1940년 이동녕이 급성폐렴으로 서거할 때 임종을 지켜봤다.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에 참여했고, 한국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는 등 묵묵히 임정을 도왔다.
충남 공주 정안 출신의 이은숙은 남편을 따라 독립운동을 벌인 사례이다. 1899년 생인 이은숙은 1908년 우당 이회영과 결혼했다. 이은숙은 중국 베이징의 자택에서 임정 요원들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고 연락을 담당했으며, 귀국 때 기밀문서를 운반하다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서울에서 허드렛일과 공장노동, 삯바느질로 자금을 마련하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1941년 10월 10일에 열린 3·1유치원(임시정부가 설립) 추계 개학 기념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첫째가 정정화, 두번째가 이국영이다.
독립운동가인 이국영(오른쪽) 민영구 부부의 결혼 사진. 사진= 독립기념관
충북 청주 출신의 이국영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이광의 딸이다. 이국영은 임정이 조직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청년공작대에 두 오빠와 함께 참여했다. 충칭에서는 한국혁명여성동맹과 3·1유치원의 교사로 일했다. 임정이 조직한 생계부의 생계위원, 3당 통합으로 탄생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김수현, 남편 민영구, 동생 이윤장과 이윤철도 독립유공자이다.
3.1 운동과 관련 천안과 아산, 공주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다수 배출됐다. 신식교육을 받은 교사와 학생으로서 만세운동에 앞장선 것이다.
천안 입장 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옥금(민영숙)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황금순(황현숙) 애국지사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7묘역에 있다.
1919년 입장 만세운동을 기리는 3.1 독립만세운동기념탑. 천안시 입장면 기미독립운동기념공원에 세워졌다.
1919년 입장면 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옥금, 한이순, 황금순에 대한 1919년 4월 28일 공주지법 재판 기록. 자료=독립기념관
민옥금, 한이순, 황금순 애국지사의 공주지법 재판 문서.
1919년 3월 천안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 만세운동은 여학생 3명이 주도했다. 사립 광명학교에 다니던 민옥금 한이순 황금순 3명은 임영신 교사에게 독립선언서를 받아 지역민들에게 배포했다. 3월 20일 광명학교 학생 80명을 이끌고 입장장터로 가서 지역주민과 함께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민옥금 한이순 황금순은 각각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4월 1일 공주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김현경의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법 재판 기록.
김현경 애국지사는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충남 서천 출신의 김인애(최기물)는 전주 남문시장 만세운동에 참여,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19년 6월 30일 전주지청 재판문서.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횃불 시위는 여성인 김복희가 주도했다. 이화고보를 다니던 그는 3·1운동으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에 내려있다가 영신학교 교사인 한연순과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3월 31일 밤 주민 50명과 함께 마을의 뒷산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외쳤다. 이 사건으로 징역 2개월을 선고받았다.
공주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김현경도 눈길을 끈다. 공주 출신의 김현경은 공주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4월 1일 영명여학교 학생들과 공주장터에서 시위를 벌이다 일경의 칼에 맞아 체포돼,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충남 서천 출신의 김인애도 3월 13일 전주시내 남문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전주의 기전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독립선언서를 뿌리다 붙잡혔다. 유치장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고, 형무소에서는 단식투쟁을 벌였다.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독립운동가 김인전 목사의 동생이다.
공주 계룡면 출신의 노예달도 이화고보 재학 중 3월 1일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 5일 남대문역 2차 만세운동에서 시위를 벌이다 체포돼,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충주 출신의 어윤희는 개성에서 전도사로 일하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개성읍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1929-30년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한 여성 투사들도 여럿 있다. 이화고보의 충남 청양 출신의 전덕제와 청주 출신의 민금봉은 동맹휴교에 참여했다가 구류 20일에 처해졌다. 근화여고의 충북 음성 출신의 민인숙과 충남 논산 출신의 이수복, 배화고보의 부여 출신 임해득, 경성여상의 대전 출신 정귀완, 태화여고의 대전 출신 민임순, 충주 출신 홍금자도 20일간 구류생활을 했다.
여성단체와 노동현장에서 싸운 여성도 있다. 충남 아산 출신의 김영순과 충남 보령 출신의 박경숙, 예산 출신의 성경애는 1919년 서울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을 벌이다 체포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충남 아산 출신의 이정현은 서울의 조선견직공장 노동조합운동에 참여, 임금삭감 반대 동맹파업을 이끌고 적색노조 준비위에서 일하다 체포돼 옥고를 겪었다. 김좌진의 6촌동생인 독립운동가 김연진이 남편이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박재복 애국지사의 묘.
박재복의 1941년 10월 29일 전주지방법원 재판기록. 자료=독립기념관
애국지사 박재복은 금고 1년형을 받았다.
충북 영동 출신의 박재복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렀다. 대전의 군시제사주식회사와 인동의 백화점에서 일하던 중 동료들에게 일본이 물자 부족으로 곧 패망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체포됐다. 육군형법 위반으로 금고 1년의 형을 치렀다.
이들 외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터를 닦았던 예관 신규식의 딸 신창희, 신규식의 동생 신건식의 부인 오건해, 신건식·오건해 부부의 딸 신순호, 유관순의 사촌 유예도 등도 충청 연고의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충남 청양 정산에서 만세를 부르다 순국한 최윤안 열사의 조카딸처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많다.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신팔균의 아내 임수명, 이규갑의 부인 이애라 등의 항일운동과 비극적인 삶도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가 많지만 여성은 매우 드물다. 조선말-대한제국-일제 36년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는 여전히 봉건적 사회·신분질서가 공고했고 여성은 운신의 폭은 매우 좁았다.
◇ 지역 출신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왼쪽부터), 정정화, 이국영, 이은숙 , 민옥 바다이야기오락실 금, 황금순
한이순(왼쪽부터), 김복희, 김현경, 김인애, 민인숙, 박재복
독립운동도 남성 중심으로 이뤄졌다. 2025년 8월 15일 현재 독립유공자는 전체 1만8569명이고 야마토게임 여성은 652명으로 3.5%에 불과하다. 상훈법에 따라 독립유공자는 1등급 대한민국장부터 7등급 대통령표창까지 추서되는데 여성 독립유공자들은 대부분 최하위 훈격인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충청권 여성 독립유공자는 30여 명으로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참여자가 많고, 남편이나 시댁을 따라 만주와 상하이, 베이징에서 항일운동을 벌인 인물도 있 오리지널골드몽 다.
충북 충주와 중국 만주에서 의병운동을 벌인 윤희순의 묘는 중국 요녕성 해성시 묘관둔 북산 하이청에 있다. 사진=독립기념관
윤희순이 1912년 환 바다이야기프로그램다운로드 인현 남괴마자에 동창학교의 분교인 노학당을 세워 인재를 길러냈다. 사진=독립기념관
가장 이른 시기 독립투쟁을 벌인 충청 여성은 충북 충주 출신의 윤희순이다. 1895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키자 식사와 의복을 지원했으며 '안사람 의병가' '의병군가' 등의 군가를 지어 전투 의지를 고취시켰다. 바다이야기pc버전다운 1907년 유홍석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자 군자금을 모으고 탄약과 군량을 공급했다. 1911년 시아버지와 남편 유제원을 따라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벌였다. 간도와 연해주의 의병들이 결성한 조선독립단에서 활동하고, 노학당의 교장을 맡아 항일인재를 키워냈다. 친척 20여 명으로 가족부대를 조직, 연락과 정보수집, 군자금 모금, 군사훈련 등을 이끌었다. 자신과 시아버지, 남편, 아들 유돈상까지 3대 4명이 독립운동가이다.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 불리는 정정화(앉은 이)와 남편 김의한(왼쪽), 시아버지 김가진. 어린이는 '임정의 아들'로 불리는 김자동이다. 정정화와 김의한 김가진 모두 독립유공자이다. 사진=독립기념관)
임정요인들과 함께 한 정정화(앞줄 왼쪽 2번째). 뒷줄 왼쪽에서 네번 째부터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이다. 사진=독립기념관
1940년 6월 17일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 앞줄 왼쪽 두번째가 정정화, 3번째가 이국영, 두번째줄 왼쪽부터 6번째가 오건해(청주 출신 신건식의 부인), 8번째가 김수현(이국영의 모친), 셋째줄 왼쪽에서 6번째가 연미당(증평 출신 연병호의 딸)이다. 사진=독립기념관
충남 예산군 대술면이 친정인 수당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 불린다. 1900년 생으로 1910년 김의한과 결혼했으며, 1920년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아 대담하게 국내를 6차례나 오가며 독립운동자금을 운반했다. 임정의 안주인 역할도 해냈다. 백범 김구와 석오 이동녕, 성재 이시영 등 임정 식구들의 끼니를 책임졌다. 1938년 남목청사건 때 피격된 김구를 간호를 하고, 1940년 이동녕이 급성폐렴으로 서거할 때 임종을 지켜봤다.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에 참여했고, 한국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는 등 묵묵히 임정을 도왔다.
충남 공주 정안 출신의 이은숙은 남편을 따라 독립운동을 벌인 사례이다. 1899년 생인 이은숙은 1908년 우당 이회영과 결혼했다. 이은숙은 중국 베이징의 자택에서 임정 요원들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고 연락을 담당했으며, 귀국 때 기밀문서를 운반하다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서울에서 허드렛일과 공장노동, 삯바느질로 자금을 마련하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1941년 10월 10일에 열린 3·1유치원(임시정부가 설립) 추계 개학 기념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첫째가 정정화, 두번째가 이국영이다.
독립운동가인 이국영(오른쪽) 민영구 부부의 결혼 사진. 사진= 독립기념관
충북 청주 출신의 이국영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이광의 딸이다. 이국영은 임정이 조직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청년공작대에 두 오빠와 함께 참여했다. 충칭에서는 한국혁명여성동맹과 3·1유치원의 교사로 일했다. 임정이 조직한 생계부의 생계위원, 3당 통합으로 탄생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김수현, 남편 민영구, 동생 이윤장과 이윤철도 독립유공자이다.
3.1 운동과 관련 천안과 아산, 공주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다수 배출됐다. 신식교육을 받은 교사와 학생으로서 만세운동에 앞장선 것이다.
천안 입장 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옥금(민영숙)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황금순(황현숙) 애국지사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7묘역에 있다.
1919년 입장 만세운동을 기리는 3.1 독립만세운동기념탑. 천안시 입장면 기미독립운동기념공원에 세워졌다.
1919년 입장면 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옥금, 한이순, 황금순에 대한 1919년 4월 28일 공주지법 재판 기록. 자료=독립기념관
민옥금, 한이순, 황금순 애국지사의 공주지법 재판 문서.
1919년 3월 천안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 만세운동은 여학생 3명이 주도했다. 사립 광명학교에 다니던 민옥금 한이순 황금순 3명은 임영신 교사에게 독립선언서를 받아 지역민들에게 배포했다. 3월 20일 광명학교 학생 80명을 이끌고 입장장터로 가서 지역주민과 함께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민옥금 한이순 황금순은 각각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4월 1일 공주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김현경의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법 재판 기록.
김현경 애국지사는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충남 서천 출신의 김인애(최기물)는 전주 남문시장 만세운동에 참여,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19년 6월 30일 전주지청 재판문서.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횃불 시위는 여성인 김복희가 주도했다. 이화고보를 다니던 그는 3·1운동으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에 내려있다가 영신학교 교사인 한연순과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3월 31일 밤 주민 50명과 함께 마을의 뒷산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외쳤다. 이 사건으로 징역 2개월을 선고받았다.
공주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김현경도 눈길을 끈다. 공주 출신의 김현경은 공주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4월 1일 영명여학교 학생들과 공주장터에서 시위를 벌이다 일경의 칼에 맞아 체포돼,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충남 서천 출신의 김인애도 3월 13일 전주시내 남문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전주의 기전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독립선언서를 뿌리다 붙잡혔다. 유치장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고, 형무소에서는 단식투쟁을 벌였다.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독립운동가 김인전 목사의 동생이다.
공주 계룡면 출신의 노예달도 이화고보 재학 중 3월 1일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 5일 남대문역 2차 만세운동에서 시위를 벌이다 체포돼,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충주 출신의 어윤희는 개성에서 전도사로 일하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개성읍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1929-30년 광주학생운동에 동참한 여성 투사들도 여럿 있다. 이화고보의 충남 청양 출신의 전덕제와 청주 출신의 민금봉은 동맹휴교에 참여했다가 구류 20일에 처해졌다. 근화여고의 충북 음성 출신의 민인숙과 충남 논산 출신의 이수복, 배화고보의 부여 출신 임해득, 경성여상의 대전 출신 정귀완, 태화여고의 대전 출신 민임순, 충주 출신 홍금자도 20일간 구류생활을 했다.
여성단체와 노동현장에서 싸운 여성도 있다. 충남 아산 출신의 김영순과 충남 보령 출신의 박경숙, 예산 출신의 성경애는 1919년 서울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을 벌이다 체포돼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충남 아산 출신의 이정현은 서울의 조선견직공장 노동조합운동에 참여, 임금삭감 반대 동맹파업을 이끌고 적색노조 준비위에서 일하다 체포돼 옥고를 겪었다. 김좌진의 6촌동생인 독립운동가 김연진이 남편이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박재복 애국지사의 묘.
박재복의 1941년 10월 29일 전주지방법원 재판기록. 자료=독립기념관
애국지사 박재복은 금고 1년형을 받았다.
충북 영동 출신의 박재복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렀다. 대전의 군시제사주식회사와 인동의 백화점에서 일하던 중 동료들에게 일본이 물자 부족으로 곧 패망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체포됐다. 육군형법 위반으로 금고 1년의 형을 치렀다.
이들 외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터를 닦았던 예관 신규식의 딸 신창희, 신규식의 동생 신건식의 부인 오건해, 신건식·오건해 부부의 딸 신순호, 유관순의 사촌 유예도 등도 충청 연고의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충남 청양 정산에서 만세를 부르다 순국한 최윤안 열사의 조카딸처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많다.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신팔균의 아내 임수명, 이규갑의 부인 이애라 등의 항일운동과 비극적인 삶도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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