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알리스로 시작하는 내일의 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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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금호동지 작성일25-12-15 15:11 조회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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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알리스로 시작하는 내일의 활력
인생의 질은 순간순간의 선택으로 결정됩니다. 특히 중년 이후 남성에게 있어 지금의 선택은 내일의 활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많은 남성들이 말없이 감당하고 있는 발기부전 혹은 성기능 저하 문제는 단순한 생리적 변화가 아니라, 삶의 에너지와 정체성, 나아가 부부 관계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부끄러움, 자책, 혹은 무관심 속에 외면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야기합니다. 성기능 문제는 숨길 일이 아니라 관리할 건강 문제다라고. 그리고 그 해결의 중심에는 바로 시알리스Cialis가 있습니다.
시알리스는 발기부전 치료제로 잘 알려져 있으며, PDE5 억제제 계열의 약물로 분류됩니다. 주성분인 타달라필Tadalafil은 음경 내 평활근을 이완시켜 혈류를 증가시키고, 이를 통해 자연스러운 발기를 유도합니다. 이 약물의 가장 큰 장점은 작용 지속 시간이 무려 36시간에 이른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히 약효가 오래간다는 의미를 넘어, 심리적 여유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성관계를 특정 시간에 맞춰 준비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고 계획 없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은 많은 사용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시알리스는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주말 약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선택해야 할까요? 성기능 문제는 단순히 방치한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며 악화되거나, 관계에 미치는 정서적 거리감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남성의 발기력은 혈관 건강과 직결되어 있으며, 이는 곧 전신 건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로 발기부전은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심혈관 질환의 전조 증상일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따라서 시알리스를 단순한 성기능 개선제로 보지 않고, 전반적인 건강 관리의 도구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알리스는 하루에 한 번 복용하는 저용량 요법도 가능합니다. 2.5mg 또는 5mg의 저용량을 매일 복용하면, 매번 약을 복용해야 하는 부담 없이 성기능이 항상 준비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특히 부부 관계의 안정성과 만족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더 나아가 시알리스는 전립선비대증으로 인한 배뇨 문제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타달라필은 전립선과 방광의 평활근을 이완시켜 빈뇨, 야간뇨, 잔뇨감 등의 증상을 완화시키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성기능과 배뇨 기능 개선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알리스는 중장년 남성에게 매우 효율적인 선택입니다.
실제 사용자들의 후기를 살펴보면 시알리스를 복용한 후 자신감이 회복되고, 관계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며, 전반적인 삶의 질이 개선되었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예전처럼 당당해졌다, 아내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등 다양한 긍정적인 변화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약물 작용이 아니라, 성기능 개선을 통해 얻는 정서적 안정과 심리적 자신감의 회복이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시알리스는 바로 그 가능성을 열어주는 열쇠입니다.
물론, 시알리스는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며, 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적절한 용량과 복용 방법을 전문가와 상의한 후 결정해야 합니다. 특히 심혈관계 질환이나 간신장 기능에 이상이 있는 경우, 혹은 질산염 성분이 포함된 약물을 복용 중인 경우에는 시알리스 사용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알리스를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과 상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약물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불필요한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입니다.
또한 시알리스는 식사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기 때문에 복용의 자유도가 높습니다. 어떤 식사를 하든지 약물의 흡수나 효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생활 패턴을 고려했을 때 매우 유용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용 후 30분에서 1시간 이내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 효과는 최대 36시간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하루 중 어떤 시간에도 자연스럽게 성생활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성기능 저하를 감추거나 무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관리하고 회복해야 할 건강 문제로 인식해야 합니다. 당신이 지금 내리는 선택은 단지 오늘 하루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내일과 그 이후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시작점입니다. 시알리스는 그 여정을 함께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안전한 파트너입니다. 부부 관계에 대한 불안, 남성으로서의 자신감 저하, 삶의 무기력함 등 다양한 고민의 중심에 발기력 저하가 자리하고 있다면, 지금이 바로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당신이 오늘 시알리스를 선택하는 순간, 내일의 활력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삶의 질은 관계에서 시작되고, 관계의 중심은 신뢰와 친밀감에서 비롯됩니다. 시알리스는 바로 그 친밀함을 회복하고, 당신의 관계를 다시 연결시키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는 단지 성생활의 회복이 아니라, 정서적 안정, 자존감, 삶의 만족도를 함께 높여주는 변화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변화는 단 한 번의 결단에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그 결단이 바로 당신이 오늘 내리는 선택, 시알리스와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더 이상 망설이지 마십시오. 발기부전은 감추어야 할 병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건강입니다. 당신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활기차고 생기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첫걸음은 시알리스로부터 시작됩니다. 과학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선택만이 남아 있습니다.
미국산 비닉스 유통기한은 제품마다 다를 수 있으므로 구매 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정품이 아닐 경우 효과가 떨어질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미국산 시알리스 팔팔은 강한 지속력으로 유명하며, 많은 남성이 선호하는 제품입니다. 또한, 미국산 시알리스 효과는 최대 36시간까지 지속될 수 있어 자연스러운 관계를 원하는 분들에게 적합합니다. 미약 디시에서도 다양한 후기를 찾아볼 수 있으며, 개인별 경험이 다르므로 신중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안전한 사용으로 최상의 효과를 경험하세요. 하나약국 전문가와 상담해보세요.
기자 admin@119sh.info
‘창조의 논리’라는 화두를 안고 끝없이 사유한 열암 박종홍. 그는 현대 한국 철학의 기본 형태를 창조하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는 어떤 철학적 사상들이 펼쳐졌을까. 현대 한국 철학의 100년을 찬찬히 음미해보고자 한다. 이런 음미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철학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남겨진 철학적 자산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열암 박종홍의 사유를 처음부터 끝까지 골드몽릴게임릴게임 관류한 가치는 건설, 구축, 발명, 창조의 가치였다. ‘창조’야말로 열암이 추구한 가치의 핵이었다. 그것은 오랜 식민지 시대를 끝내고 다시 역사의 폐허 위에 서서 사유를 시작해야 했던 한 철학자의 지상 가치였다. 다른 한편 그의 사유를 관류하는 척추와도 같은 중심은 곧 ‘논리’였다. 그는 논리학이라는 무기를 손에 들고서 시대를 뚫고 나가려 했다. 열암 사유 바다이야기게임장 의 이 두 중심이 만나는 곳에서 생성한 그의 인생의 화두, 철학적 화두는 바로 ‘창조의 논리’였다. 열암 사유의 핵은 바로 창조의 논리이다.
창조의 논리를 구축하기 위해 그는 거대한 논리학 체계를 기획했다. 이 체계는 일반 논리학, 인식논리학, 변증법적 논리학, 역(易)의 논리학, 창조의 논리학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사이다쿨 우리는 변증법적 논리학과 역의 논리학 사이에 부정의 논리학을 삽입해 그의 체계를 여섯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의 학위논문이 다룬 부정론은 변증법적 논리학을 넘어서는 부정의 논리학으로서 이해될 수 있고, 또 이 논리학이 역의 논리학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논리학 체계가 완성되었다면 이는 세계철학사의 지평에서도 찬연하게 빛 바다이야기APK 나는 성취가 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이 기획은 부정의 논리학 단계에서 그치고 말았다. 정작 결정적인 국면인 역의 논리학 바로 앞에서 멈추고 만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의 부정의 논리학에서 역의 논리와 창조의 논리가 어떤 형태를 띨 수 있었을지를 일정 정도 이끌어내 볼 수 있다.
릴게임야마토열암 박종홍의 사유는 거대한 논리학 체계의 기획으로부터 출발해 창조의 논리 구축을 핵심으로 한다. 그 논리학 연구의 출발점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일반 논리학’은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논리학과 현대의 기호논리학을 다루고 있다. 흥미롭게도 열암은 결론 부분에서 일반 논리학의 한계와 창조의 논리에 대한 예비적 고찰을 논한다. 일반 논리학을 쓸 때 이미 창조의 논리학을 정점으로 하는 체계를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열암은 창조를 공상적이고 우연적인 비-합리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기보다 “일정한 목적을 현실적으로 구현화(具現化)하는 실천”으로 규정하고, 이런 실천은 “부정(Negation)을 매개로” 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아울러 그가 특히 염두에 두는 창조는 역사적-정치적 창조라는 점이 중요하다. 다음 구절은 열암 철학의 성격 전체를 잘 보여준다. “역사적 현실의 객관적 제약을 바로 보아 그때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요구를 사회, 국가, 민족 내지 전 인류의 입장에서 확립시키는 곳에 창조의 목적이 뚜렷하여질 것을 짐작하게 된다.”(‘전집 II’, 176쪽) 특히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창조, 그의 일생의 화두는 바로 “새로운 민족의 창조”였다.
박종홍은 자신의 독자적인 논리학 체계를 저술한 두번째 책에서 칸트와 신칸트학파를 중심으로 인식의 논리를 다루었다. 사진은 이마누엘 칸트(1790년께). 위키미디어 코먼스
논리학 체계의 두번째 권인 ‘인식논리’는 칸트와 신칸트학파를 중심으로 인식의 논리를 다루고 있으며, 칸트에 관한 상세한 논의를 전개한 후 서남학파의 리케르트, 라스크, 바우흐 및 마르부르크학파의 코엔, 하르트만, 카시러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나아가 ‘조작’(operation) 개념을 핵으로 하는 과학철학의 흐름 및 러셀, 비트겐슈타인, 카르나프, 에이어의 인식론까지 다루고 있다. 당대의 인식론 연구로서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정치한 연구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세번째 권인 ‘변증법적 논리’에서는 헤겔을 중심으로 변증법적 사유가 다루어지고 있고, ‘실존변증법’이라는 제하에서는 키르케고르, 니체, 야스퍼스, 하이데거의 사유를 변증법의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이 세 권―그중에서도 특히 ‘변증법적 논리’―은 매우 방대한 논의를 담고 있으며, 열암 사유의 알맹이가 될 다양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는 거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의 창조의 논리를 예감케 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특히 논리학 체계의 네번째 권으로 간주할 수 있는 ‘부정에 관한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열암은 이 연구에서 부정의 문제, 부정의 인식론적 근거, 부정의 형식논리적 규정, 부정의 방법론적 의의, “앎”의 근거로서의 인간적 부정, 부정의 존재론적 근거의 여섯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거니와,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부정의 존재론적 근거 대목이다. 여기에서 열암은 특히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논하고 있으며, 그 논의를 이어 창조의 논리로 나아갈 수 있는 몇몇 단초를 마련하고 있다.
박종홍의 논리학 저술 세번째 권은 헤겔을 중심으로 변증법적 사유를 다루었다. 사진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야코프 슐레징거, 1831). 위키미디어 코먼스
부정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아니다’(Nein)라고 말할 때 성립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부정의 행위는 ‘아님’(das Nicht)이라는 존재론적 근거 위에서 성립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다시 이 ‘아님’은 ‘무 일반의 아니게-함(das Nichten)’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절대 무가 아니라, 그 어떤 있는 것(존재자)도 아니라는 점에서의 없음─가 ‘아니게-함’을 내포하고, 이 ‘아니게-함’에서 아님이 성립하고, 이 아님에 근거해서 ‘아니다’라는 언표 또는 행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아니라고-함’(nichten)이라는 행위는 ‘무의 아니게-함’에 근거한다.
인간(=현존재)은 자신과 세계의 존재함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이는 곧 인간이 ‘무’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임을 뜻한다. 존재(있음)는 모든 존재자(있는 것)를 존재케 하는 근거이거니와, 그것은 또한 그 어떤 존재자도(나무도, 건축물도, 노래도, 사상도, …) 아닌 그-어디에도-없는-것이기에 무이다. 존재는 곧 무인 것이다. 이 존재, 즉 무를 이해하는 존재자는 인간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존재의 목동”이자 “무의 자리지기”이다. 인간은 존재가 그를 향해 열어-밝혀져 있고 또 그 자신은 존재에게로 들어가-있는 그런 존재이다. 인간이 ‘Dasein’(현존재)인 것은 바로 그가 이곳(‘Da’=‘現’)에서, 즉 들어가-있고 열어-밝혀져-있는 곳─존재와 인간이 주름을 형성하는 이 ‘세계’(die Welt)─에서 실존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가 현존재에게 열어-밝혀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는 그 어떤 존재자도 아니기에 세계에 드러나지 않는 무-임을 그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존재는 스스로를 드러내기도 하고 또 스스로를 숨기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헤라클레이토스를 따라 “존재 자체는 투쟁적인 것이다. 그 투쟁적인 것 속에 Nichten의 본질의 유래가 숨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휴머니즘에 관한 서한’) 하이데거는 이 투쟁을 ‘세계의 개현(開顯)’과 ‘대지의 은폐(隱蔽)’ 사이의 투쟁이라 부른다. 그리고 세계와 대지 사이의, 드러냄과 숨김 사이의 이 투쟁에서 새로운 사유와 언어가, 창조적인 것이 생겨난다. 따라서 세계와 대지의 투쟁은 어느 하나가 스러지는 승부의 투쟁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간의 투쟁을 통해 사유와 언어를 이루어내는 창조적 투쟁이다. “이 투쟁 이 존재의 이른바 역운(歷運, Geschick)으로서의 역사(Geschichte) 성립의 근거가 된다.”(‘전집 Ⅱ’, 667쪽)
열암은 드러냄과 숨김 사이의 이런 투쟁과 그러한 과정을 통한 창조를 “부정에 의한 긍정”으로서 포착한다. 이는 그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투쟁보다는 부정을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을 함축한다. 부정을 전제하지 않고 투쟁을 논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또 하나, 열암은 부정성의 존재론적 위치를 존재에가 아니라 현실에 둔다는 점이 핵심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서는 부정에 입각한 투쟁과 그 결과로서 창조가 이루어지는 곳은 바로 현실인 것이다. 이로써 하이데거와는 상이한 존재론적 구도가 천명된다.
“나는 부정의 궁극적인 존재론적 근거로서의 부정성 자체를 현실(現實)이라고 부른다. 현실은 동적인 전개 과정 자체요 다름 아닌 부정성이다. 이 부정성인 현실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실체도 주체도 문제로서 등장한다. 동시에 부정성은 곧 역사성이요, 따라서 현실은 역사적 현실이다. 부정성은 다름 아닌 역사적 현실이다.”(‘전집 Ⅱ’, 678쪽)
그러나 현실을 부정성 자체로서 본다면, 달리 말해 부정성을 역사적 현실로 본다면, “우리 인간은 이 역사적 현실의 부정성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수용적인[수동적인] 입장에만 서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열암의 문제의식이다. 이는 달리 말해서 “역사적 현실의 부정성을 자각함으로써 인간은 그 역사적 현실에 대하여 어떻게 새로운 참여를 할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오랜 식민지 시대를 끝내고 다시 역사의 폐허 위에 서서 사유를 시작해야 했던 열암 박종홍은 “새로운 민족의 창조”를 화두로 삼았다. 사진은 1945년 8월15일 여운형(아랫줄 오른쪽 넷째)이 휘문중학교에서 열었던 건국준비위원회 집회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열암은 역사의 부정성에 인간 자신의 부정성으로 맞섬을 역설한다. 이는 곧 인간이 그 스스로가 역사적 부정성의 산물임을 자각하되, 그러한 부정성의 괴뢰(傀儡)가 되기보다 오히려 부정성을 역사적 현실로 돌려 그것의 형성에 참여함을 뜻한다. 열암의 이런 사유 구도를 ‘현실변증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부정성은 창조성으로 화한다. 열암에게서 창조란 무엇보다도 우선 새로운 역사의 창조를 뜻한다.
여기에서도 열암은 도가나 불가를 비판한다.(그러나 그의 비판은 다소 일면적이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사유에서도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한다는 적극적인 면이 거세되고 있음”을 지적한다.(‘전집 Ⅲ’, 390쪽) 그의 지향은 역시 유교이다.
열암에게서 창조성으로서의 부정성은 곧 하늘의 이치(天理)이다. 그리고 이 부정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하늘이 인간에게 준 ‘성’(性)을 자각하는 것이고, 이 자각에 입각해 천지의 화육을 돕는 것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창조인 것이다. 열암의 이런 관점은 성리학적 전통(‘성즉리’)을 따르면서도 인간이 천지의 화육을 도와서 창조를 이루는 행위에 방점을 찍는 생각이다. 그래서 열암에게서의 새로운 역사의 창조는 한편으로는 천명에 입각하는 것이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창조여야 한다. 객체성과 주체성 사이의 이런 균형과 상호성은 그에게 특히 중요한 것이었다.
천리인 부정성의 발현인 부정은 그저 한갓된 반항이나 파괴일 수 없다. 오히려 나의 고정된 아집으로서의 긍정을 위한 긍정을 무리하게 관철하려는 것이 반항이요 파괴다. 자각된 부정성, 자각된 천리의 발현으로서의 부정이라면 그것은 반항이 아니라 천명이다.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요, 이미 건설인 것이다.(‘전집 Ⅱ’, 683쪽)
열암은 창조의 논리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우리는 그 기본 방향성을 잡아내 볼 수 있다.
이정우 철학자
철학자 이정우 l 서울대학교에서 미셸 푸코로 학위를 받았다. 대안공간 철학아카데미에서 시민 강좌를 열었고, 지금은 소운서원에서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철학사’ 4부작(2011~2024)을 펴냈고, 현재는 ‘소운 철학 대계’를 집필하고 있다.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는 어떤 철학적 사상들이 펼쳐졌을까. 현대 한국 철학의 100년을 찬찬히 음미해보고자 한다. 이런 음미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철학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남겨진 철학적 자산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열암 박종홍의 사유를 처음부터 끝까지 골드몽릴게임릴게임 관류한 가치는 건설, 구축, 발명, 창조의 가치였다. ‘창조’야말로 열암이 추구한 가치의 핵이었다. 그것은 오랜 식민지 시대를 끝내고 다시 역사의 폐허 위에 서서 사유를 시작해야 했던 한 철학자의 지상 가치였다. 다른 한편 그의 사유를 관류하는 척추와도 같은 중심은 곧 ‘논리’였다. 그는 논리학이라는 무기를 손에 들고서 시대를 뚫고 나가려 했다. 열암 사유 바다이야기게임장 의 이 두 중심이 만나는 곳에서 생성한 그의 인생의 화두, 철학적 화두는 바로 ‘창조의 논리’였다. 열암 사유의 핵은 바로 창조의 논리이다.
창조의 논리를 구축하기 위해 그는 거대한 논리학 체계를 기획했다. 이 체계는 일반 논리학, 인식논리학, 변증법적 논리학, 역(易)의 논리학, 창조의 논리학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사이다쿨 우리는 변증법적 논리학과 역의 논리학 사이에 부정의 논리학을 삽입해 그의 체계를 여섯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의 학위논문이 다룬 부정론은 변증법적 논리학을 넘어서는 부정의 논리학으로서 이해될 수 있고, 또 이 논리학이 역의 논리학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논리학 체계가 완성되었다면 이는 세계철학사의 지평에서도 찬연하게 빛 바다이야기APK 나는 성취가 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이 기획은 부정의 논리학 단계에서 그치고 말았다. 정작 결정적인 국면인 역의 논리학 바로 앞에서 멈추고 만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의 부정의 논리학에서 역의 논리와 창조의 논리가 어떤 형태를 띨 수 있었을지를 일정 정도 이끌어내 볼 수 있다.
릴게임야마토열암 박종홍의 사유는 거대한 논리학 체계의 기획으로부터 출발해 창조의 논리 구축을 핵심으로 한다. 그 논리학 연구의 출발점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일반 논리학’은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논리학과 현대의 기호논리학을 다루고 있다. 흥미롭게도 열암은 결론 부분에서 일반 논리학의 한계와 창조의 논리에 대한 예비적 고찰을 논한다. 일반 논리학을 쓸 때 이미 창조의 논리학을 정점으로 하는 체계를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열암은 창조를 공상적이고 우연적인 비-합리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기보다 “일정한 목적을 현실적으로 구현화(具現化)하는 실천”으로 규정하고, 이런 실천은 “부정(Negation)을 매개로” 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아울러 그가 특히 염두에 두는 창조는 역사적-정치적 창조라는 점이 중요하다. 다음 구절은 열암 철학의 성격 전체를 잘 보여준다. “역사적 현실의 객관적 제약을 바로 보아 그때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요구를 사회, 국가, 민족 내지 전 인류의 입장에서 확립시키는 곳에 창조의 목적이 뚜렷하여질 것을 짐작하게 된다.”(‘전집 II’, 176쪽) 특히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창조, 그의 일생의 화두는 바로 “새로운 민족의 창조”였다.
박종홍은 자신의 독자적인 논리학 체계를 저술한 두번째 책에서 칸트와 신칸트학파를 중심으로 인식의 논리를 다루었다. 사진은 이마누엘 칸트(1790년께). 위키미디어 코먼스
논리학 체계의 두번째 권인 ‘인식논리’는 칸트와 신칸트학파를 중심으로 인식의 논리를 다루고 있으며, 칸트에 관한 상세한 논의를 전개한 후 서남학파의 리케르트, 라스크, 바우흐 및 마르부르크학파의 코엔, 하르트만, 카시러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나아가 ‘조작’(operation) 개념을 핵으로 하는 과학철학의 흐름 및 러셀, 비트겐슈타인, 카르나프, 에이어의 인식론까지 다루고 있다. 당대의 인식론 연구로서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정치한 연구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세번째 권인 ‘변증법적 논리’에서는 헤겔을 중심으로 변증법적 사유가 다루어지고 있고, ‘실존변증법’이라는 제하에서는 키르케고르, 니체, 야스퍼스, 하이데거의 사유를 변증법의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이 세 권―그중에서도 특히 ‘변증법적 논리’―은 매우 방대한 논의를 담고 있으며, 열암 사유의 알맹이가 될 다양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는 거대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의 창조의 논리를 예감케 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특히 논리학 체계의 네번째 권으로 간주할 수 있는 ‘부정에 관한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열암은 이 연구에서 부정의 문제, 부정의 인식론적 근거, 부정의 형식논리적 규정, 부정의 방법론적 의의, “앎”의 근거로서의 인간적 부정, 부정의 존재론적 근거의 여섯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거니와,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부정의 존재론적 근거 대목이다. 여기에서 열암은 특히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논하고 있으며, 그 논의를 이어 창조의 논리로 나아갈 수 있는 몇몇 단초를 마련하고 있다.
박종홍의 논리학 저술 세번째 권은 헤겔을 중심으로 변증법적 사유를 다루었다. 사진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야코프 슐레징거, 1831). 위키미디어 코먼스
부정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아니다’(Nein)라고 말할 때 성립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부정의 행위는 ‘아님’(das Nicht)이라는 존재론적 근거 위에서 성립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다시 이 ‘아님’은 ‘무 일반의 아니게-함(das Nichten)’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절대 무가 아니라, 그 어떤 있는 것(존재자)도 아니라는 점에서의 없음─가 ‘아니게-함’을 내포하고, 이 ‘아니게-함’에서 아님이 성립하고, 이 아님에 근거해서 ‘아니다’라는 언표 또는 행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아니라고-함’(nichten)이라는 행위는 ‘무의 아니게-함’에 근거한다.
인간(=현존재)은 자신과 세계의 존재함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이는 곧 인간이 ‘무’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임을 뜻한다. 존재(있음)는 모든 존재자(있는 것)를 존재케 하는 근거이거니와, 그것은 또한 그 어떤 존재자도(나무도, 건축물도, 노래도, 사상도, …) 아닌 그-어디에도-없는-것이기에 무이다. 존재는 곧 무인 것이다. 이 존재, 즉 무를 이해하는 존재자는 인간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존재의 목동”이자 “무의 자리지기”이다. 인간은 존재가 그를 향해 열어-밝혀져 있고 또 그 자신은 존재에게로 들어가-있는 그런 존재이다. 인간이 ‘Dasein’(현존재)인 것은 바로 그가 이곳(‘Da’=‘現’)에서, 즉 들어가-있고 열어-밝혀져-있는 곳─존재와 인간이 주름을 형성하는 이 ‘세계’(die Welt)─에서 실존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가 현존재에게 열어-밝혀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는 그 어떤 존재자도 아니기에 세계에 드러나지 않는 무-임을 그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존재는 스스로를 드러내기도 하고 또 스스로를 숨기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헤라클레이토스를 따라 “존재 자체는 투쟁적인 것이다. 그 투쟁적인 것 속에 Nichten의 본질의 유래가 숨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휴머니즘에 관한 서한’) 하이데거는 이 투쟁을 ‘세계의 개현(開顯)’과 ‘대지의 은폐(隱蔽)’ 사이의 투쟁이라 부른다. 그리고 세계와 대지 사이의, 드러냄과 숨김 사이의 이 투쟁에서 새로운 사유와 언어가, 창조적인 것이 생겨난다. 따라서 세계와 대지의 투쟁은 어느 하나가 스러지는 승부의 투쟁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간의 투쟁을 통해 사유와 언어를 이루어내는 창조적 투쟁이다. “이 투쟁 이 존재의 이른바 역운(歷運, Geschick)으로서의 역사(Geschichte) 성립의 근거가 된다.”(‘전집 Ⅱ’, 667쪽)
열암은 드러냄과 숨김 사이의 이런 투쟁과 그러한 과정을 통한 창조를 “부정에 의한 긍정”으로서 포착한다. 이는 그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투쟁보다는 부정을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을 함축한다. 부정을 전제하지 않고 투쟁을 논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또 하나, 열암은 부정성의 존재론적 위치를 존재에가 아니라 현실에 둔다는 점이 핵심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서는 부정에 입각한 투쟁과 그 결과로서 창조가 이루어지는 곳은 바로 현실인 것이다. 이로써 하이데거와는 상이한 존재론적 구도가 천명된다.
“나는 부정의 궁극적인 존재론적 근거로서의 부정성 자체를 현실(現實)이라고 부른다. 현실은 동적인 전개 과정 자체요 다름 아닌 부정성이다. 이 부정성인 현실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실체도 주체도 문제로서 등장한다. 동시에 부정성은 곧 역사성이요, 따라서 현실은 역사적 현실이다. 부정성은 다름 아닌 역사적 현실이다.”(‘전집 Ⅱ’, 678쪽)
그러나 현실을 부정성 자체로서 본다면, 달리 말해 부정성을 역사적 현실로 본다면, “우리 인간은 이 역사적 현실의 부정성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수용적인[수동적인] 입장에만 서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열암의 문제의식이다. 이는 달리 말해서 “역사적 현실의 부정성을 자각함으로써 인간은 그 역사적 현실에 대하여 어떻게 새로운 참여를 할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오랜 식민지 시대를 끝내고 다시 역사의 폐허 위에 서서 사유를 시작해야 했던 열암 박종홍은 “새로운 민족의 창조”를 화두로 삼았다. 사진은 1945년 8월15일 여운형(아랫줄 오른쪽 넷째)이 휘문중학교에서 열었던 건국준비위원회 집회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열암은 역사의 부정성에 인간 자신의 부정성으로 맞섬을 역설한다. 이는 곧 인간이 그 스스로가 역사적 부정성의 산물임을 자각하되, 그러한 부정성의 괴뢰(傀儡)가 되기보다 오히려 부정성을 역사적 현실로 돌려 그것의 형성에 참여함을 뜻한다. 열암의 이런 사유 구도를 ‘현실변증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부정성은 창조성으로 화한다. 열암에게서 창조란 무엇보다도 우선 새로운 역사의 창조를 뜻한다.
여기에서도 열암은 도가나 불가를 비판한다.(그러나 그의 비판은 다소 일면적이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사유에서도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한다는 적극적인 면이 거세되고 있음”을 지적한다.(‘전집 Ⅲ’, 390쪽) 그의 지향은 역시 유교이다.
열암에게서 창조성으로서의 부정성은 곧 하늘의 이치(天理)이다. 그리고 이 부정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하늘이 인간에게 준 ‘성’(性)을 자각하는 것이고, 이 자각에 입각해 천지의 화육을 돕는 것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창조인 것이다. 열암의 이런 관점은 성리학적 전통(‘성즉리’)을 따르면서도 인간이 천지의 화육을 도와서 창조를 이루는 행위에 방점을 찍는 생각이다. 그래서 열암에게서의 새로운 역사의 창조는 한편으로는 천명에 입각하는 것이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창조여야 한다. 객체성과 주체성 사이의 이런 균형과 상호성은 그에게 특히 중요한 것이었다.
천리인 부정성의 발현인 부정은 그저 한갓된 반항이나 파괴일 수 없다. 오히려 나의 고정된 아집으로서의 긍정을 위한 긍정을 무리하게 관철하려는 것이 반항이요 파괴다. 자각된 부정성, 자각된 천리의 발현으로서의 부정이라면 그것은 반항이 아니라 천명이다.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요, 이미 건설인 것이다.(‘전집 Ⅱ’, 683쪽)
열암은 창조의 논리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우리는 그 기본 방향성을 잡아내 볼 수 있다.
이정우 철학자
철학자 이정우 l 서울대학교에서 미셸 푸코로 학위를 받았다. 대안공간 철학아카데미에서 시민 강좌를 열었고, 지금은 소운서원에서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철학사’ 4부작(2011~2024)을 펴냈고, 현재는 ‘소운 철학 대계’를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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