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충현원에 있는 러셀 블레이즈델 미 공군 군종의 동상.


3년 전부터 꾸준히 달리기를 하고 있다. 열풍에 편승한 달리기지만 열정만큼은 진심이다. 달릴 때마다 워치를 켜고 기록을 남긴다. 운동을 마치면 기록 화면을 캡처해 SNS에 올리는 일도 어느새 의례가 됐다. 혼자만의 결심을 타인의 시선 앞에 세워 둠으로써 꾸준함을 유지하려는 나름의 선언이다. 그렇게 나는 계속 뛰었고 앞으로도 뛸 작정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주객이 전도됐다. 뛰기 위해 공유하는 것인지, 공유하기 위해 뛰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달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리던 중 워치 배터리가 꺼졌다. 평소보다 긴 10㎞ 코스를 기분 좋게 완주한 날이었다. 그러나 워치에 남은 기록은 고작 3㎞ 남짓. 숨이 가쁠 때까지 즐겁게 뛰느라 기기가 꺼진 줄도 몰랐던 것이다.
러닝을 마치고 검게 꺼진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열심히 뛰었는데 이걸 증명하지 못하다니.” 땀에 젖은 야마토통기계 몸과 터질 듯한 심박수보다 기록되지 못한 숫자에 대한 허탈함이 먼저 찾아왔다. 곰곰이 돌아보니 뭔가 이상했다. 나는 왜 뛰었나. 기록이 남지 않으면 그 질주는 무효인가. 누군가 알아주지 않으면, 보여줄 수 없으면, 그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가.
이 질문은 달리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신약성경 마태복음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황금성릴게임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마 6:3)라고 명한다. 하지만 미디어와 SNS가 공기처럼 된 시대에 이 말은 점점 추상적이고 멀게 들린다. 알리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세상에서, 조용한 선행은 쉽게 사라진다. 교회의 신뢰가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교회들도 하나라도 더 알려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비치기도 한다. 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 오리지널골드몽 는 것처럼 보인다는 불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품은 채 지난주 광주광역시 충현원에서 열린 ‘한국전쟁 고아 구출 작전 75주년 기념식’ 취재를 다녀왔다. 고아 구출 작전의 실질적 주도자는 오랫동안 알려져 온 미 공군 조종사 딘 헤스가 아니라, 당시 미 제5공군 군목이었던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이었다. 그는 군목 신분으 바다이야기예시 로 아이들을 책임졌고 그 책임 때문에 군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감찰 조사까지 받았다. 1000여명의 아이를 제주도로 옮기기 위해 수송기를 확보하고 이동 경로를 조율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공식적으로 바로잡히기까지는 70년이 넘게 걸렸다. 그 사이 대중의 기억 속에서 고아 구출 작전은 ‘유모차 공수 작전’이라는 이름의 영웅 서사로 굳어졌고, 그 중심에는 늘 헤스가 있었다. 헤스는 자서전과 영화를 통해 고아 구출 작전을 극화했고 이 과정에서 블레이즈델은 상대적으로 묻혔다.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남았고 침묵한 사람의 공적은 서사 밖으로 밀려났다.
그 구조를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자료가 최근 공개된 두 통의 편지다. 1956년 헤스를 조명하는 영화가 개봉하자, 당시 부관이었던 마이크 스트랭은 블레이즈델에게 괴로운 심정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 현장을 함께 겪은 사람으로서 이 왜곡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블레이즈델의 답장은 조용하고도 단호했다. 그는 사실의 왜곡을 인정했다. 영화와 책이 영웅을 만들기 위해 많은 부분을 비틀었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와 나는 진실을 알고 있네.” 그리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적었다. 명예를 되찾기 위한 싸움보다 그날 아이들을 살린 선택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블레이즈델은 ‘억울한 피해자’라기보다, 침묵을 선택한 인물로 드러난다. 그는 몰라서 묻힌 것이 아니었다. 왜곡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었고, 바로잡을 기회도 있었다. 다만 누가 더 많이 기억되는지를 다투는 싸움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목적은 명예가 아니라 아이들의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오래도록 이야기에서 사라졌다. 영웅 서사는 말하는 사람에게 남고, 침묵하는 사람은 기록에서 밀려난다. 블레이즈델은 그 구조를 감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진실의 힘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진심은 연구자와 생존자, 후예들에 의해 마침내 인양됐다. 정부는 지난해 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기자가 쓴 기사 댓글에는 “살아계실 때 받으셨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뒤늦게 도착한 이 훈장은 또 다른 울림을 준다. 진정성 있는 섬김과 헌신은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실은 스스로를 증명하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 아무리 두꺼운 망각의 덮개도 결국 뚫고 나온다.
다시 나의 러닝으로 돌아온다. 기록이 남지 않아도 달리기는 달리기다. 숨이 가쁘고 다리가 아프고, 다음 날 근육통이 남는다. 그 고통은 설명하지 않아도 내 몸이 기억한다. 선행도 마찬가지다.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기사로 기록되지 않아도, 누군가의 삶에는 분명히 생명의 흔적이 남는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은 아무도 알리지 말라는 금기가 아니다. 무엇을 위해 뛰는지, 누구 앞에서 의미를 확인하려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러셀 블레이즈델의 이름이 75년 만에 다시 불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애쓴 사람이 아니라, 기록보다 생명을 먼저 선택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하느냐보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나는 여전히 달린다. 여전히 워치를 켜고 때로는 기록을 공유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워치의 숫자가 멈춰도 나의 질주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알아주지 않아도 선한 선택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삶은 고요하다.
광주=글·사진 손동준 기자 sdj@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